1970년
8월 15일 광복절에
제4집단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넘어서는 제4부(문화부)로
한국문화의
해방을
알리기 위해
관을 50개 준비하고
50미터 간격으로
사직공원을 출발하여
독립문
서대문
광화문
시청 앞
명동
신세계백화점
남대문 시장
삼각지
용산 거리를 행진하며
그리고
제1한강 백사장에
도착해
제4집단
선언문을 소개하고
강령을 낭독하고
관을 화장해 버리며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을 치르려 했다
당시 언론은 냉소적이었다.
"10대 불량아보다 더한 문제아"
"설득력 없는 괴로운 쇼"
하지만 젊은 문학가의 말을 인용하며
이를 옹호하는 입장도 쓰고 있네요
"세상은 다양해야 더욱 살만하고 구경할 만 것이 아닌가
프랑스 속담에도 Vive le difference가 있지 않은가
그런 친구가 나와야 재미있겠죠.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니까"
제4집단의 중하는 무체주의
이를 가장 잘 대변하는 행위예술은
그 당시
누드 퍼포먼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구림은
정강자 씨가
100% 누드로 무대에 서자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
환경예술이다"
제 1막 무대는
번화가 명동에서
저녁 6시
"당신은 처녀임을 무엇으로 증명하시겠습니까"
구호를 앞가슴에 단 한 사나이가
작은 쇼윈도위로 들어가면
더벅머리 총각이
등 뒤에
"목표액 4천4백4십4만원 잃어버린 나를 찾음
연락처 제4집단"
이란 글귀를 붙이고
벽 유리 가까이 다가온다
그때 명동국립극장에서는
<산불> 연극을 공연하고 있어
극장 앞에 수십명의 관객이 줄 서 있었다
제4집단 단원들이
거기 제3막 뱅뱅돌아가는 세상
무대장치를 하려고 하자
국립극장 관계자와 옥신각신하며
시비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신세계 백화점 앞으로 이동한다
이들은 결국 도로교통법위반으로
명동파출소에 연행되다
제4집단 회원은 이렇게 경찰에게 이렇게 외친다
"현대라는 우리 속에 인간들이 모두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나는 찾을 수 없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처녀는 우리가 항시 생각하는 처녀라기보다는
현대문명으로 말살되어가는 인간의 순결을 나타낸 것뿐입니다"
한편 남대문 경찰서에 체포된 사람도 있었다
"도로교통법이 어찌하여 예술을 양해해주지 않나요"라고
경찰과 신문 중에 한 단원이 말한다
경찰의 단원간의 실랑이 벌어진다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예술을 한다는 말이오"
"우리가 하는 것은 해프닝이라고 하오"
"해프닝이란 뭔가"
"즉흥예술이오 이게 모래와 꽃이오
우리는 이 재료를 가지고 작품을 하려고 하오
작품의 재료가 됩니다"
"뭐요"
"대지예술이라고도 합니다"-주간여성
김구림(35)씨는 맨 앞에서
백기를 들고 선두주자로 행진하고 있다.
김구림은
"제4집단의 4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 숫자를 싫어해서 이걸 택했고
백기는 이 집단의 기로 삼은 것은
순결 순박 순수를 뜻하기 때문이라는 걸이오"
또한 단원은
누드를 체험예술이라고도 말한다
이런 기사는 가십기사로
선데이 서울 청춘 고고 주간여성 등에 실렸다
요즘 창조경제라는 말이 낯설듯
무한예술이라는 말이 낯설었을 것이다
여기서 관은 모든 모순을 상징한다
이 해프닝이 있기 전에는
1970.5.27일 이들은 이미 이와 유사한 거리해프닝을 벌렸다
육교 위에 고무풍선을 띄우고 카바마인가루
(하얀 밀가루처럼 생김 몸에 크게 해롭지 않으나 쥐약으로 오인하기 쉽기에 공포에 떨다)와 찢어진 콘돔 가지고 아무렇게나 쓰인 숫자를 담은 흰색봉투를
행인에게 나눠주거나 뿌리면서 이걸 무한예술을 외친다
이에 대한 일반인의 반응은 "매좀 맞아야겠다"
부정적 반응(언론은 아주 시니컬한 시선으로 보다)을 부각시키다
"경찰이 발로 관을 건드리자
작품 함부로 다룬다고 항의"
김구림 한마디
"오늘 우리는 고질화된 기성체제의 대한 고발과
낡은 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문화인들을 장사시키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50미터 간격을 유지한 것은
일반 시위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단원의 말 중 이런 것도 있다
"캔버스의 틀에서 벗어난 거리로
이것은 위대한 전위예술"
그러나 언론이나 일반인은
"유토피아 사상에 사로잡힌 사람들" 등등
젊잖은 표현이고 때로는 이보다 더 심한
미친놈 소리 들을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