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시 51

사랑하는 마음 - 랠프 월도 에머슨

사랑하는 마음 -랠프 월도 에머슨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고 해서 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어느 장소에 있든 그를 바라보던 눈길과 사랑하는 마음은 그의 가슴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는 행복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어느 정도의 괴로움과 두려움이 더해져야만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행복한 날을 추억한다 누군가는 사랑의 비밀을 이렇게 말한다 모든 기쁨이나 즐거움 중에서도 오직 사랑의 가치만이 어떤 고통이든 이겨낼 수 있다

기성시 2024.04.09

[헤르만 헤세] 안개 속에서

안개 속에서 - 헤르만 헤세 이상하구나,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숲과 들이 모두 외롭고 나무들은 서로를 보지 않으니 모두가 다 혼자이어라. 내 삶이 빛으로 밝을 때에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지만, 그러나 이제 안개가 드리우고 나니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어둠은 조용히 피할 수도 없이 사람들을 격리시킨다. 이 어둠을 모르는 사람을 누가 현명하다 말할 것인가.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삶이란 정녕 고독한 것. 누구도 다른 이를 알 수 없으니 사람이란 결국 모두 다 혼자인 것을.

기성시 2024.03.04

[허난설헌] 애절한 봄노래

천재시인 허난설헌 - 애절한 봄노래 뒤뜰이 고요한데 봄비에 살구꽃은 지고 목련꽃 핀 언덕에선 꾀꼬리가 우짖는다. 수실 늘인 장막에 찬 기운 스며들고 큰 향로에선 한 가닥 향이 피어오르누나. 잠에선 깨어난 미인은 다시 화장을 하고 향기로운 허리띠엔 원앙이 수 놓였다. 옷소매를 걷고 비취이불을 갠 뒤 시름없이 은쟁반 안고 봉황의 노래를 탄다. 금 굴레 안장 탄 당신은 어디 가셨나요. 정다운 앵무새는 창가에서 속삭인다. 풀잎에서 날던 나비는 뒤뜰로 사라지더니 난간 밖 아지랑이 낀 꽃밭에서 춤을 춘다. 누구 집 연못가에서 피리소리 구성진가. 밝은 달은 아름다운 금술 잔에 떠 있는데 시름 많은 사람만 홀로 잠 못 이루어 새벽에 일어나면 눈물만 고이는구나.

기성시 2024.03.01

[정연복] 3월 첫날의 햇살

3월 첫날의 햇살 - 정연복 아직 매서운 추위가 바싹 고개를 쳐들고 있지만 오늘 햇살에서는 봄기운이 뚝뚝 묻어난다. 백삼 년 전 기미년 3월1일 그날도 삼천리 방방곡곡 밝은 햇살이 비추었을 거야.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던 용맹스런 선조들의 얼굴마다 가슴마다 햇살이 찾아왔을 거야.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 여태 다 청산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새 보란 듯이 온 세계에 우뚝 선 대한민국. 이제 이 나라 이 땅의 한 사람 한 사람 너와 내가 참자유와 평화 또 민주의 희망 햇살이 되자.

기성시 2024.03.01

[서정주] 눈 오시는 날

눈 오시는 날 - 서정주 내 연인은 잠든 지 오래다. 아마 한 천년쯤 전에… 그는 어디에서 자고 있는지, 그 꿈의 빛만을 나한테 보낸다. 분홍, 분홍, 연분홍, 분홍, 그 봄 꿈의 진달래꽃 빛깔들. 다홍, 다홍, 또 느티나무 빛, 짙은 여름 꿈의 소리나는 빛깔들. 그리고 이제는 눈이 오누나… 눈이 와서 내리 쌓이고, 우리는 저마다 뿔뿔이 혼자인데 아 내 곁에 누워 있는 여자여. 네 손톱 속에 떠오르는 초생달에 내 연인의 꿈은 또 한 번 비친다

기성시 2024.02.14

[박성룡]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 박성룡(1934∼2002) 오늘 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 새 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의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의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 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되찾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Un jour de vent - Pak Săng-yong Tiens, aujourd'hui le vent palpite sans arrêt! Saurait-il aussi Que je perds aujourd'hui tout ce qui es..

기성시 2024.02.08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메리 엘리자베스 프라이(1905∼2004)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잠들어 있지 않아요. 나는 천 갈래 바람이 되어 불고, 눈송이 되어 보석처럼 반짝이고, 햇빛이 되어 익어가는 곡식 위를 비추고, 잔잔한 가을비 되어 내리고 있어요. 당신이 아침의 고요 속에서 깨어날 때, 원을 그리다 비상하는 조용한 새의 날개 속에도 내가 있고 밤하늘에 빛나는 포근한 별들 중에도 내가 있어요.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죽은 게 아니랍니다.

기성시 2023.12.05

프랑수아 비용(1431~1463?) 유언시 중

우리 죽은 뒤 살아갈 형제들이여 우리에게 냉혹한 마음을 품지 말라 차라리 그대들 우리를 불쌍히 여길 때 신께서는 곧 그대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라 보라 여기 우리들 다섯 여섯씩 목매달려 포식으로 길러온 육체는 이미 오래 전에 뜯어지고 썩어지고 우리의 해골은 진토가 되어간다 아무도 우리의 비운을 비웃지 말라 다만 신께 구하라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해줄 것을! 우리 비록 법으로 처형된 몸이나 그대들을 형제라 부름을 탓하지 말라 인간이 모두 옳은 생각만을 가질 수 없는 일 이는 그대들도 알고 있다 이미 우리는 죽은 몸이니 용서하고 성모 마리아의 아들께 기도드리라 우리에게 내리는 그의 은총이 마르지 않고 지옥의 불길에서 우리를 지켜주도록 우리는 죽은 몸 누구도 우리를 괴롭히지 말고 다만 신께 구하라 우리 모두의 죄..

기성시 2023.11.30

운주사(雲住寺), 가을비

운주사(雲住寺), 가을비 - 르 클레지오(노벨문학상 수상자) 흩날리는 부드러운 가을비 속에 꿈꾸는 눈 하늘을 관조하는 와불(臥佛) 구전에 따르면, 애초에 세분이었으나 한 분 시위불이 홀연 절벽쪽으로 일어나 가셨다. 아직도 등을 땅에 대고 누운 두분 부처는 일어날 날을 기다리신다 그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거란다. 서울거리에 젊은이들, 아가씨들 시간을 다투고 초를 다툰다. 무언가를 사고, 팔고 만들고, 창조하고, 찾는다. 운주사의 가을단풍 속에 구름도랑을 바치고 계시는 두분 부처님을 아뜩 잊은채 (중략) 고요하고 정겨운 인사동의 아침 광주 예술인의 거리 청소부들은 거리의 널린 판지들을 거두고 아직도 문이 열린 카페에는 두 연인들이 손을 놓지 못한다. 살며, 행동하며 맛보고 방관하고 오감을 빠져들게 한다 번..

기성시 2023.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