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시 65

[박성룡]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 박성룡(1934∼2002) 오늘 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 새 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의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의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 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되찾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Un jour de vent - Pak Săng-yong Tiens, aujourd'hui le vent palpite sans arrêt! Saurait-il aussi Que je perds aujourd'hui tout ce qui es..

기성시 2024.02.08

[프라이]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메리 엘리자베스 프라이(1905∼2004)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잠들어 있지 않아요. 나는 천 갈래 바람이 되어 불고, 눈송이 되어 보석처럼 반짝이고, 햇빛이 되어 익어가는 곡식 위를 비추고, 잔잔한 가을비 되어 내리고 있어요. 당신이 아침의 고요 속에서 깨어날 때, 원을 그리다 비상하는 조용한 새의 날개 속에도 내가 있고 밤하늘에 빛나는 포근한 별들 중에도 내가 있어요.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죽은 게 아니랍니다.

기성시 2023.12.05

프랑수아 비용(1431~1463?) 유언시 중

우리 죽은 뒤 살아갈 형제들이여 우리에게 냉혹한 마음을 품지 말라 차라리 그대들 우리를 불쌍히 여길 때 신께서는 곧 그대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라 보라 여기 우리들 다섯 여섯씩 목매달려 포식으로 길러온 육체는 이미 오래 전에 뜯어지고 썩어지고 우리의 해골은 진토가 되어간다 아무도 우리의 비운을 비웃지 말라 다만 신께 구하라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해줄 것을! 우리 비록 법으로 처형된 몸이나 그대들을 형제라 부름을 탓하지 말라 인간이 모두 옳은 생각만을 가질 수 없는 일 이는 그대들도 알고 있다 이미 우리는 죽은 몸이니 용서하고 성모 마리아의 아들께 기도드리라 우리에게 내리는 그의 은총이 마르지 않고 지옥의 불길에서 우리를 지켜주도록 우리는 죽은 몸 누구도 우리를 괴롭히지 말고 다만 신께 구하라 우리 모두의 죄..

기성시 2023.11.30

운주사(雲住寺), 가을비

운주사(雲住寺), 가을비 - 르 클레지오(노벨문학상 수상자) 흩날리는 부드러운 가을비 속에 꿈꾸는 눈 하늘을 관조하는 와불(臥佛) 구전에 따르면, 애초에 세분이었으나 한 분 시위불이 홀연 절벽쪽으로 일어나 가셨다. 아직도 등을 땅에 대고 누운 두분 부처는 일어날 날을 기다리신다 그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거란다. 서울거리에 젊은이들, 아가씨들 시간을 다투고 초를 다툰다. 무언가를 사고, 팔고 만들고, 창조하고, 찾는다. 운주사의 가을단풍 속에 구름도랑을 바치고 계시는 두분 부처님을 아뜩 잊은채 (중략) 고요하고 정겨운 인사동의 아침 광주 예술인의 거리 청소부들은 거리의 널린 판지들을 거두고 아직도 문이 열린 카페에는 두 연인들이 손을 놓지 못한다. 살며, 행동하며 맛보고 방관하고 오감을 빠져들게 한다 번..

기성시 2023.11.25

[길상호] 바람의 무늬

바람의 무늬 - 길상호 시인(1973년생 논산출생) 산길 숨차게 내려와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내 마음의 끝가지도 툭툭 부러뜨리는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따르고나의 생각들도 쫓아갔다가 이내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만큼이나 아득하여서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바람과 나무가 나누는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의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풍경 소리가 내 마..

기성시 2023.10.27

브레히트 - 아이들의 부탁

브레히트 반전시 - 아이들의 부탁 "집은 불타면 안 되어요. 폭격기를 몰라서는 안됩니다. 밤은 잠을 자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삶은 형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엄마들은 울면 안 되어요. 누구도 당신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Die Häuser sollen nicht brennen. Bomber sollt man nicht kennen. Die Nacht soll für den Schlaf sein. Leben soll keine Straf sein. Die Mütter sollen nicht weinen. Keiner sollt töten einen.“ Bertolt Brecht, Die Bitten der Kinder.

기성시 2023.10.13

보들레르보다 한 수 위 황진이

- 오감을 다 만족시키는 그런 언어의 조응(correspondance)이 총출동되다 황진이 천재(이 시에서 시각과 청각, 청각과 촉각, 청각과 후각이 뒤섞여 황홀하다), 보들레르가 오감의 황홀경(빛깔과 소리와 향기 등)을 노래하기 오래 전에 이미 이렇게 노래다. "물들이네-취했네(색채와 도취)-소리가 향기로워라(소리와 향기) -그리움이 길게 뻗어가리(감정과 전이)" 이 구절이 특히 인상적이다. "흐르는 저 강물은 거문고 소리에 어울려 차갑고(율동과 소리와 체온) 매화곡 곡조는 피리소리에 들어 향기로워라(음색과 향기와 영상)" 달빛 아래 뜨락의 오동잎 다 지는데,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란빛 물들었네. 누각은 높아서 하늘은 손에 닿을 듯, 일천 잔 도는 술잔에 사람들 취했네. 흐르는 저 강물은 거문고 소리에 ..

기성시 2023.10.04

「不惑의 秋夕」천상병

「不惑의 秋夕」 -천상병 -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老子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포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다 지내고 음복을 하고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간다.

기성시 2023.10.04

[김수영] 꽃잎

꽃잎-김수영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많이는 아니고 조금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한 잎의 꽃잎 같고혁명(革命)같고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 같고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고

기성시 2023.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