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시

[길상호] 바람의 무늬

김형순 '스키타이' 2023. 10. 27. 22:53

바람의 무늬 - 길상호 시인(1973년생 논산출생)

 

산길 숨차게 내려와

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

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

내 마음의 끝가지도 툭툭 부러뜨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

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따르고

나의 생각들도 쫓아갔다가 이내

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만큼이나 아득하여서

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

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

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

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

바람과 나무가 나누는

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

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의

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

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

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

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

풍경 소리가 내 마음의 골짜기에서

다시 한 번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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