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무늬 - 길상호 시인(1973년생 논산출생)
산길 숨차게 내려와
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
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
내 마음의 끝가지도 툭툭 부러뜨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
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따르고
나의 생각들도 쫓아갔다가 이내
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만큼이나 아득하여서
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
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
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
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
바람과 나무가 나누는
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
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의
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
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
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
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
풍경 소리가 내 마음의 골짜기에서
다시 한 번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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