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994] 남도기행 강진-해남-목포

김형순 '스키타이' 2020. 8. 21. 13:48

산루(山樓)에서 -다산 정약용

 

피리 소리 끊어진 산속 누각에
까마귀 떼 황혼을 날아가는데
마당에 홀로 서서 이슬꽃 바라보네

바람 부는 대숲에 달빛이 부서지고
늘어진 국화꽃이 비 온 후에 다시 피네

종묘에 떡 올리던 한양 생각 새롭고
술빚은 이웃 찾는 시골집이 부럽구나

엊그제 한양 성에 살던 이 몸이
어인 일로 하늘 끝에 밀려왔는지 <1795>

 

<1992-2003년(지학사 시절)까지 10년 간 봄 휴가와 여름 휴가 때 전국 문화유적지 답사. 당시 유홍준 선생 때문에 유행. 1989년 교사 시절 여름 방학 한 달 간 유럽기행 후, 그 허전함(실망)을 달래려고 직장 옮기고서 2001년에는 일본도,

1994년 제1탄: 해남 강진 다산 초당 등 기록 남아 있네요. 남도 기행(봄 휴가 3월 10일) 부제: 목표, 강진, 해남을 돌며 "여행은 짧고 추억은 길다"

첫 날 제2의 고향 같은 목포: 나는 5살부터 10살 사이에 마산에서 살았다. 그 때 내 친구 중 목포가 고향인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의 이상한 매력에 내 마음을 늘 빼앗겼다. 그가 가끔 자기 고향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의 이야기속에 빠져 넋을 놓고 듣곤 했다. 그때부터 나는 목포를 꼭 한 번 가 보리라 믿었는데 이번 휴가에 그 꿈을 이룬 것이다.
목포 가는 길 호남선 통일호 오전 11시 20분발 기차에 몸을 담았다. 이 열차는 목포에 16시 50분 도착할 예정이다. 거의 6시간이 걸리는 만만치 않은 긴 여정이다. 그렇지만 어제까지 피곤한 몸도 배낭을 매면 오히려 힘이 난다.

어느 촌로의 만남: 기차는 그리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내 옆자리에는 전형적 시골 촌노(村老)가 앉아 계셨다. 나는 곽재구 시인의 기행문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을 읽으면서 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그의 글은 너무 미학적이랄까 내 머리에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반쯤 졸면서 글을 읽다가 창문을 내다보면 조국의 산하가 그리운 가슴으로 내 마음에 들어와 날 반기는 듯 하다.
남도 가는 길은 비교적 터널이 드문 편이다. 어느덧 1시가 너머 2시가 다가오니 시장기가 든다. 난 아내가 정성스럽게 싸 준 두 개의 도시락 중 한 개를 꺼냈다. 한 개의 양으론 꽤 많았다. 옆에 앉아 계신 촌노에게 김밥을 건네니 고맙다고 기꺼이 받으신다.
그때서야 그 촌노는 나에게 말을 건네신다. 자신은 고향이 장성 근처이고 아들이 둘이 있는데 큰아들은 공수 부대 지원해서 군에 가 있고, 작은아들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닌단다. 요즘 시골에선 노총각이 많아 야단이란다. 자신의 아들도 이런 일을 겪지 않을까 걱정하는 표정이다.
하절기에는 농사를 지으시고 겨울에는 비닐 농사(딸기)하는데 지난번에 갑작스런 폭설로 큰 피해를 보신 모양이시다. 촌노의 한마디 말씀이 나의 마음을 찌른다. “요즘 사람들 마음이 너무 뾰족해요. 서로 남을 찌어요.”. 촌노가 권하는 영지 버섯 한 병에서 난 아직도 시골의 따뜻한 인정을 느꼈다.

난생 처음 본 목포: 내가 난생 처음 본 목포는 대체로 깨끗했다. 바닷가 눈앞에 바로 보이지 않아 좀 갑갑했지만 유달산 우뚝 솟아 있고 도시의 기개가 있어 보인다. 난 무조건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돈다. 종점같이 보이는 곳에 내려서 또 다른 버스를 탄다.
무심코 1번 버스를 탔는데 다행히도 이 버스는 해양 대학이 있고 목포 앞바다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무안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신안 앞바다: 저녁 6시가 넘으니 바다의 석양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 찬란한 노을 빛을 카메라에 어찌 안 담을 수 있을까! 나는 이 무안 앞바다 노을을 바라보며 오늘의 모든 힘듦을 다 보상받았다. 갑자기 여행자의 애수와 피곤이 몰려왔지만 어린 시절 마산에서 보던 그 황홀한 저녁 바다를 다시 보는 것같이 감회가 새롭다. 바다는 그 물결과 파도의 열정으로 언제나 날 반긴다. 뒤로는 유달산이 보이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유달산에 올라: 바다 쪽에서 유달산을 넘으면 목포 시가 한 눈에 들어올 것 같다. 난 무조건 산으로 향했다. 언덕빼기 동네 아이들에게 길을 물으니 여기에서도 유달산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단다.
벌써 저녁 7시가 된 어둠이 깊이 내리고 아주 낯선 곳에서의 이색적 행복감에 젖어 든다. 한참 산을 오르다 보니 몸이 축축해질 정도로 땀이 난다. 시원한 바람에 갑자기 몸이 풀리면서 배가 고프다. 배낭에서 아내가 싸 준 두 번째 김밥을 꺼낸다. 찬 바닷바람에 몸을 떨며 이곳까지 온 것이 믿기기 않는다. 내 이마에 맺힌 땀방울만큼 내 몸도 피곤했는지 김밥이 그렇게 달았다. 혼자 먹기에는 많은 양인데 금방 없어졌다.
산 정상까지는 못 갔어도 기기묘묘한 암벽이며 능선을 바라보며 그 바위 위에 걸터앉아 목포 시를 내려다보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앞으로 보면 신안 앞바다, 돌아서면 목포 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시내 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지런히 정비되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도 보이고 유달산의 팔각정도 보인다. 남산의 팔각정과는 또 다른 멋이 있다.

일본풍의 목포 부둣가: 나는 일부러 걸어서 시내 구경을 하고 싶었다. 목포 부둣가 주변을 서성이다 보니 일본풍이다. 이 시가 일제 시대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분비는 큰 항구 도시였음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지방 도시의 특징들이 자꾸만 사라짐은 정말 안타깝다. 다들 전국 도시가 서울화하는 것은 TV탓이리라. 그래도 목표는 비교적 덜한 편이다. 내일 강진 가는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고 근방에 싸구려 여관을 찾다가 ‘거북장’이라는 여관에 겨우 몸을 풀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커리를 시키지 않았으나며 불쑥 문을 여는 여자도 있었다. 몸이 굉장히 피곤했던지 아니면 목포가 내 고향처럼 느껴졌던지 나는 이 낯선 도시에서도 쉽게 잠이 들었다.

둘째 날 목표에서 강진으로
다음날 발길을 서둘러 강진 가는 버스를 탔다. 나의 길을 잘 못 찾는 불치병이 다시 도져 버스를 잘못 내리고는 결국 다시 강진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가는 길에는 쌀 개방 구호가 눈에 띄고 경상도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현실 직시적 인식과 정치 안목이 주는 긴장감을 주는 요소들이 은연중 배여 있다. 여행 중에는 배고픔이나 허기 증세가 별로 없다. 우선 공기가 좋고 서울과는 낯선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그 풍물과 표정들이 나를 들뜨게 한다. 드디어 강진 터미널에 도착해서 아침을이 식빵에 우유로 떼운다. 빵이라도 먹고 나니 기분이 상쾌하다.

정겨움과 따사함이 넘치는 ‘강진’: 오늘은 ‘다산 초당(草堂)’을 구경하는 것이 급선무다. 다산 초당은 한적한 곳이라 버스가 자주 가지 않았다. 겨우 오전 11시 40분에야 차가 있었다. 시간도 남고 마음도 여유도 찾을 겸 강진 읍을 들로 보기로 했다. 이곳 저곳 둘러보니 영남 지방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온화함과 부드러움이 그득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너무나 뒤떨어져 가슴이 아프다. 그럼에도 하류 강줄기에 심각한 오염으로 그 폐해가 심했다. 여기에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영랑 시비(詩碑)’와 ‘생가(生家)’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실학의 산실 ‘다산 초당(草堂)’ : 다산 초당 가는 길은 지극히 한적한 시골길로 가는 것 그 자체다. 하긴 유배지가 그렇지 않다면 이상하겠지만… 다산 초당 가는 길 멀리 갈대밭 있는 강진 앞바다 지금은 바다 매립 사업 때문인지 어수선해 보인다. 도무지 바다 같다는 느낌이 안 든다. 그래도 갈대밭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서걱이고 있고 구강포 앞바다는 말못할 사연과 슬픈 역사가 무슨 판소리 가락처럼 구슬프게 뽑혀 나오는 것 같다.
드디어 다사 초당 들어서는 곳 그의 추모비가 있고 대나무 숲이 남도의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너무나 한적한 ‘귤동 마을’이 나오고 국문과 영문으로 된 다산 유적 안내문(사적 107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이 그 입구를 우뚝 서 있다.

동백꽃의 붉은 미소가 주위에 가득하고: 좁은 샛길로 가다 보면 대나무 밭이 나오고 다산이 18년간을 귀향 생활 중 10년을 지낸 그의 초당이 보인다. 아름드리 감나무, 소나무, 오동나무, 왕벚 꽃나무며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또한 너무나 강한 인상을 주는 동백꽃이 그 꽃봉오리를 수줍게 내밀고 있다. 그 빛깔은 장미의 붉은 빛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격정적이다. 그가 기거하던 한 칸 초당에 서면 다산이 나를 반가이 맞이하는 듯하다. 너무나 안온하고 그윽한 고요가 흐르는 곳이다. 그가 차를 끓여 먹었다는 일명 ‘약천(藥泉)’ 약수 한 사발 마시고 정신을 차린다. 김정희가 썼다는 ‘다산 초당(茶山草堂)’글씨가 보인다.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글씨다. 그 옆으로 강진 앞바다 구강 포가 한눈에 들어오는 ‘천일각’이 있다. 이 누각은 정말 정겨움과 평안함을 주는 곳이다.

최고 석학이자 대시인 ‘다산(茶山)’ : 다산은 우리 나라 지식인 중 으뜸이다. 그는 대학자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다. 그는 한시 2500편의 시를 남겼지만 번역된 것은 그리 많지는 않다. 30대 후반에 쓴 그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산루(山樓)에서

피리 소리 끊어진 산속 누각에
까마귀 떼 황혼을 날아가는데
마당에 홀로 서서 이슬꽃 바라보네

바람 부는 대숲에 달빛이 부서지고
늘어진 국화꽃이 비 온 후에 다시 피네

종묘에 떡 올리던 한양 생각 새롭고
술빚은 이웃 찾는 시골집이 부럽구나

엊그제 한양 성에 살던 이 몸이
어인 일로 하늘 끝에 밀려왔는지 <1795>

그의 신세 타령은 꼭 이곳을 염두에 두고 노래한 것 같다. 조선 왕조 500년 중 가장 위대한 학자 정약용은 그 시대가 소화해 내기에는 너무나 큰 인물이었나 보다. 그의 실학 사상은 우리 문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는 호기를 마련해 주었지만 그 당대로는 그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살아 남은 우리들의 몫이다. 그의 보편적 애민 사상과 근대적 과학 정신을 현대화하고 세계화하는 건 지금도 시급한 과제 중 하나다.

실학의 산 교과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가 이곳 유배 생활 18년 동안에 『목민심서(牧民心書<48권>)』을 완성한 일이다. 우리 문화사에 이런 지적 유산은 드문 것으로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 않다. 강진 앞바다 갈대밭 같은 백성들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부여안고 고민하며 그 시대의 아픔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의 창시자로 또 역사를 앞서가는 자의 고뇌와 그 체취를 이곳에서 물씬 느낄 수 있다.

‘영랑’ 생가(生家)와 시비(詩碑): 해남으로 가려면 일단 강진 읍으로 돌아가는 것이 편하다. 나는 영랑 시비를 꼭 보고 싶어 버스 터미널 앞에서 길을 물으니 여기에서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란다. 그가 가리키는 영랑 시비를 향하다 또 지나가는 어느 할아버지께 또 길을 물으니 그는 찬찬히 알려주신다. 그분은 알고 보니 앞이 안 보이는 소경이셨다. 그럼에도 “영랑 시비, 내가 잘 알지, 이 길로 쭉 가시오.” 하시며 손끝으로 가리킨다. 그는 영랑 시인이 이곳에 태어난 것이 그지없이 자랑스러운가 보다.

대지주의 아들 영랑(永郞) 시인: 영랑 생가(生家)와 그의 시비(詩碑)을 둘러보니 그가 대지주의 아들로 어린 시절 호사한 생활을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한 시인의 탄생은 대개 한 집안을 뿌리째 흔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의 시비는 지나치게 치장된 것 같아 그의 생가가 주는 자연스러운 초가 가옥의 미학을 흐트러뜨린다. 좀 지나치게 커 보이는 영랑 시비에는 그의 대표시 ‘모란이 피기까지는’는 초고 원고 맞춤법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잇슬 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휜 설움에 잠길 테요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三百)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이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그의 시는 방언의 토속적 언어와 음악적 리듬, 자연 환경에서 오는 시적 황홀감과 서정적 빼어남은 돋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너무 문예적 기교주의와 정신적 귀족주의로 기울고 있지 않나 싶다.
그의 생가 자체가 양지 바른 시인의 혼을 꽃 피우기에 너무나 안성맞춤인 곳이다. 한 시인이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해남으로:다시 발길을 돌려 해남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오후 4시 차가 있다. 약40분 정도 거리다. 해남 터미널에 도착해, 빵 한 조각에 간단히 요기를 하고 터미널 옆 관광 안내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어디로 먼저 갈까 고민하다가 ‘대흥사’로 가야 한다는 생각 외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해남 시의 표정도 서울과 많이 흡사한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중심지를 빠져나오니 정말 기분이 좋다. 이곳의 특이한 풍경 중 하나는 무덤이 밭 가운데 내려와 있다는 것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별이 없는 곳 너무나 죽음이 삶과 가까이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한긴 우리의 표현에는 유난히 죽음과 관련된 어휘도 많고 좋은 것도 ‘좋아 죽겠다’고 말하니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일까

두륜산 품에 안긴 ‘대흥사’: 대흥사 입구 그 앞에 널려진 장급 호텔의 모습은 주변 자연의 풍광과 너무 어울리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벌써 어둠이 내리고 하루의 끝을 알려 주고 있다. 여기서 대학생 하나를 만나 외로운 내 여정의 짝을 얻게 된다. 개학은 했지만 그 동안의 아르바이트를 이제야 끝내고 이곳에 왔단다. 생각도 건강해 보이고 모습도 믿음직스럽다.
대흥사 들어가는 길 1킬로미터 이상이나 되는 기난긴 길이었는데 그 그윽함과 정취는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우리는 저녁놀이 지기 시작하면서 뿌려지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푹 빠져 버렸다. 대자연의 웅장한 스펙터클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넋을 놓고 감탄을 터트릴 뿐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신선(神仙: 산의 사람)이 되고 선사(仙師)도 된다.

‘천불전(千佛展)’의 소담한 멋 : 두륜산이 보이고 달마산 기슭 대웅전 건축 양식은 신라 풍인데 건축적 조형미에서는 수준이 좀 떨어지는 면도 없지 않다. 대웅전 위쪽에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천불전(千佛展: 천불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요, 때나 장소를 떠나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 불교의 부처다라는 안내문이 있음)’에서 본 천 개의 작은 불상들은 대웅전의 크고 화려한 불상보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 같아 더욱 좋았다. 대흥사를 지나면서 나는 이런 옛 시구절을 떠올렸다.

산은 백 번을 돌아가고,
물은 천 번을 굽이치네.

근사한 저녁 식사 ‘된장 찌개’: 대흥사의 멋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우리는 다시 버스 타는 곳으로 내려오니 저녁 7시 30분. 마침 우리는 해남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는 행운을 잡았다. 마치 둘만을 위한 자가용이 된 버스를 타고 해남 시로 돌아왔다. 해남에서 오래간만에 저녁 식사를 했다. 오늘 처음으로 된장 찌개에 밥을 먹으니 속이 든든하다. 가격은 서울 못지 않게 비싸다. 그 식당에서 소개받은 ‘금호장’ 에서 몸을 풀며 하루를 접는다. 그 대학생 덕분에 여관비는 반으로 줄었다.

셋째 날 새 아침 ‘토말(土末)’을 향하여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세수를 하고 서둘러 ‘토말(土末:땅끝 마을)’로 향한다. 어부 사시가의 대시인 윤선도의 기거지였던 녹우당(綠雨堂)은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했다.

해남의 무공해 사람들: 해남 중심지를 빠져 나와 땅끝 ‘갈두 마을’ 가는 길은 주변의 푸른 들판과 푸른 바다에 마음이 들뜬다. 해남의 토박이 사투리가 판소리 가락처럼 들려 오고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표정은 그야말로 무공해 인간들의 전형이다. 노인층 인구가 많고 일부 학생들을 빼놓고는 젊은이는 찾아보기 보기 힘들다. 바닷가 보이면서 아름다운 한반도의 땅끝 마을로 가는 중에 보이는 멋진 소나무 숲에 더욱 멋진 해수욕장이며 푸른 들판과 높은 하늘에 봄바람이 그득하여 마음은 마냥 즐겁다.

‘전망대’와 ‘봉화대’: 토말이 가까워지니 정말 서울에서 멀리 왔구나 싶다. 여기까지 온 기념으로 사진 몇 장을 갖은 폼을 다 잡아가며 찍어 본다. 바닷가 차 돌멩이며 조개 껍데기를 모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옛 봉화대가 있는 ‘토말 전망대’를 올라가기로 마음먹고 길도 없는 곳을 그냥 마구잡이로 그 대학생과 함께 기어오른다. 산이 가파르고 가시나무에 손이 찔려 피도 나고, 다리도 아프고, 땀도 흘렸지만, 일단 전망대에 오르니 바닷바람이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이마의 땀방울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토말 전망대 그곳에는 옛 봉화대가 옛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토말비’와 ‘토말탑’: 드디어 봉화대에서 내려오다 보면 ‘토말비’가 나타났다. 멀리 ‘보길도’ ‘어룡도’ ‘백일도’ ‘흑일도’ ‘당인도’ 까지도 훤히 볼 수 있는 ‘토말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곳으로 내려가는데 올라오는 일행도 있어 우린 그들에게 길을 물곤 했다.
‘토말탑’에 닿으니 멀리 확 트인 바다가 보인다. 윤선도의 ‘어부 사시가’의 배경이 된 ‘보길도’가 꿈의 섬으로 다가와 더욱 내 마음을 유혹한다. 이런 봄바다에 앞에 서면 그 누가 시인이 되지 않겠는가! 멀리 중국 대륙도 보이는 것 같고 제주도도 보이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모든 고행이 한줌 바람으로 사라진다.
토말탑 안내문을 여기에 옮긴다. “우리 나라 육지부의 최남단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사자봉. 땅끝 극남 북위 34도 17분 38초, 동경 126도 6분 1초, 여기에 높이 10미터 바닥 3,6밀리미터의 토말탑을 세운다.” 또 10미터의 뾰족한 토말탑에는 향토미가 물씬 풍겨 나는 다음 시가 새겨져 있다.

우리 나라 맨 끝의 땅
갈두리 사자봉 땅 끝에 서서

길손이여
토말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수묵처럼 스며드는 情
한 가슴 벅찬 가슴 먼발치로
벽두에서 토말까지 손을 흔들게

수천 년 지켜 온 땅 끝에 서서
수만 년 지켜 갈 땅 끝에 서서
꽃밭에 바람인 듯 손을 흔들게

마음에 묻힌 생각
하늘이 바람에 띄어 보내게

바다는 하나의 창문: 바다는 하나의 창문이다. 창문을 통해 나를 보고 다른 이들을 보고 이 나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세계의 미래도 내다본다. 그 동안 교과서 작업의 힘겨움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동행자들과 바닷가에서 그 동안 여행의 소감을 나누며 오래간만에 말문을 열었다. 그들의 여행론은 당당하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얼마냐 소중하냐며 여행은 생생한 삶의 확인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어머니의 흙가슴 같은 조국의 땅을 밟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마침 여기에서 광주로 가는 직행 버스가 있어 전남의 중앙부로 향할 수 있었다. 월출산을 지나 영암, 나주를 거쳐 광주로 들어갔다. 광주도 나로서는 처음이다. 무등산이 광주의 어머니 산으로 빛고을을 품고 있었다. 광주 버스 터미널은 새로 지워져 그런지 외국 공항처럼 깨끗하고 편리하다. 특히 터미널에 시립 박물관이 있어 참 보기가 좋았다.
광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날이 흐려지더니 비가 온다. 갑자기 다산(茶山)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나다.

구름 사이 터진 햇볕 꽃빛이 새로웁고,
가랑비가 오려는가 나뭇잎이 먼저 우네.

여행은 짧고 추억은 길다 : 버스 속에서 다른 동행자들의 팀장과 나란히 앉게 되어 한국인의 미의식이며 우리만의 독특한 조형 예술에 대한 격이 없는 대화 속에 하나의 생활 예술의 가능성과 그 공감대를 이루 수 있었다. 예컨대 그림 하나가 우리 인간 공간에 주는 지대한 영향하며, 문화 주체적 접근 방식이 우리 정신적 삶의 결을 얼마나 높여 주는지 등을 이야기하면서 장장 4시간의 대화 마당은 채웠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우리 역사와 국토와 만난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집에 돌아오니 밤 10시가 넘었다.
모든 추억을 카메라에 담고 이제는 현실의 삶에 충실할 것을 다짐해 보며 이 모든 경험과 열정을 내 삶의 활력소로 이입시키는 것만이 내게 남은 과제였다. 그렇다. 그렇지. “여행은 짧고 추억은 길다.”라고 - 1994년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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