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지하와의 작별> -염무웅 - 염무웅 선생님 글을 허락도 없이 가져오다'
지난 5월 8일 시인의 별세 이후 그의 장례는 너무도 쓸쓸하여 그의 말년의 그늘진 삶을 더욱 쓸쓸하게 했다. 많은 친구와 후배들이 우리의 김지하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감정을 공유했다. 그를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이미 마음에서 떠나보낸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 그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도 생겼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의 많은 시와 저작들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자산이다.
어제 6월 25일 오후 그의 49재 행사가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라는 이름으로 네 시간에 걸쳐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렸다. 뜻밖이라 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 김지하가 결코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는 걸 실감케 했다. 중음신으로 구천을 떠돌던 그를 드디어 저세상으로 보냈다는 마음이 든다. 김지하도 큰 위로를 받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또 다른 산책을 떠났을 것이다.
다음은 추모문화제 이부영 준비위원장의 부탁으로 작성했던 추도문 <수난과 구도의 삶을 기억하며>를 대폭 보완한 것이다. 꽤 긴 글이니, 시간 나실 때 읽어보시라. 뒤에 붙인 것은 오늘 유튜브에 올라온 것.
김지하가 이룬 것과 남긴 것 -염무웅
(1) 김지하가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였고, 시인으로 등단한 것은 1969년 월간지 <시인>을 통해서였다. 이후 그는 군사독재의 탄압에 맞서 싸운 투사로서 전후 네 차례 7년여의 감옥살이를 했고, 이 고난의 시간을 통해 획기적인 문학적 업적을 산출하는 동시에 다양한 방면의 학습과 깊은 사색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생명 사상’을 구상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인의 민주적 열망을 대표하는 투시로 각인되는 동안 그의 시 자체는 충분한 비평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 더욱이 21세기 들어 그의 정치적 행로가 투사로서의 기존 이미지와 달라지자 논의 자체가 중단되었고, 그는 많은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 반세기의 한국 역사를 깊이 있게 설명하자면 김지하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의 고난에 찬 삶의 과정과 그로부터 태어난 예술적•사상적 결과물은 우리 현대사 자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 돌이켜보면 1960년대 중엽 김지하를 처음 알게 됐을 때 그는 나에게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박정희 정권의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며 궐기한 학생운동 속의 모습이었다. 1964년 봄 학교를 갓 졸업하고 어느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근무가 끝나면 복학한 친구들을 만나러 동숭동의 농성현장으로 가곤 했는데, 그때 김지하의 쉰 듯한 목소리가 뿜어내는 뜨거움을 부끄럽지만 나는 외곽에서 바라보았을 뿐이다.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하며 주로 서구문학의 좁은 울타리에 갇혀 지내온 나 같은 사람의 눈에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외친 민족문제의 심각성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다른 하나는 시인이자 미학이론가로서의 김지하였다. 1964년 5월쯤이던가, 을지로 5가 뒷골목의 어느 술집에서 시화전이 열렸고, 거기서 나는 아마 처음으로 金之夏라는 이름으로 쓰여진 그의 시를 보았다. 그의 시뿐만 아니라 그 시화전에 나온 다른 분들의 시도 대부분은 그동안 내가 읽어오던 우리나라의 시적 관습에서 벗어난 낯설고 실험적인 것들이었다. 후일 김지하 본인은 당시 자기가 슈르(초현실주의) 풍의 모더니즘 계열 시를 썼다고 했는데, 여하튼 그때까지의 내 감각에는 친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 나는 그의 논문발표를 듣게 됐다. 박종홍 교수가 늘 철학개론을 강의하던 문리대 대형강의실에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정규 강의가 끝난 뒤의 어둑한 분위기가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제목은 <추(醜)의 미학>. 칸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미학 바깥을 더듬는 내용이었는데, 역시 나에게는 낯설뿐더러 적잖은 충격이었다. 지하 자신의 후일 고백에 따르면 그 발표는 헤겔의 제자인 19세기 독일 철학자 칼 로젠크란츠(Johann Karl Friedrich Rosenkranz, 1805~79)의 저서 <추의 미학>(Ästhetik des Häßlichen, 1853)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 주목할 것은 그가 로젠크란츠라는 서구학자의 이론을 수용하되 단순히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하는 로젠크란츠의 미학을 발판 삼아 우리 고유의 전통예술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이론적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추의 미학’이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로젠크란츠가 서구 근대미학의 몰락의 징후를 보았다면 김지하는 잠들어 있던 한국 전통미학의 새로운 회생 가능성을 읽었던 셈이다.
김지하는 1960년대 중엽부터 서구 모더니즘에 여전히 한발 담그고 있으면서도 주로 조동일(趙東一) 학형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탈춤이나 풍물 또는 민요나 판소리 같은 우리의 전통예술의 중요성에 눈을 떴고 이용희(李用熙, 1917~1997) 교수의 회화사 연구에 자극받아 조선 후기의 풍속화와 실경산수(實景山水)를 주목하게 되었다. 거듭 말하건대 김지하의 ‘추의 미학’은 초현실주의 같은 모더니즘 서구예술로부터 우리 자신의 민족•민중미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론적 초석을 놓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부터 나는 지하와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가 폐결핵으로 요양차 입원해 있던 역촌동 병원에도 몇 번 갔었다. 지하의 삶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소설가 오영수 선생 댁을 여러 번 동행한 일이었다. 갓 결혼한 나의 셋방이 오선생 댁 가까운 우이천 옆이었던 것도 한 인연이다. 당시에 그는 오선생의 장남인 미대 후배 오윤(吳潤)의 남다른 미술적 재능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이런 교류의 결과로 그는 미학과 선배인 김윤수(金潤洙) 선생의 이론적 지도와 오윤 등의 실천적 뒷받침을 조직하여 과감하게 리얼리즘 미술운동에 시동을 걸었고, 알다시피 그것은 지난 반세기 사이 손장섭•주재환•김정헌•노원희⃐•임옥상•강요배•황재형 등 수많은 재능이 참여한 ‘현실과 발언’ 동인 운동 등을 거쳐 한국미술의 새 역사를 쓰는 데까지 엄청나게 발전했다.
(3) 1970년은 김지하 개인에게나 한국시의 역사에서나 특별한 해였다. 5월에는 담시 <오적>이 폭탄처럼 문단과 정치-사회를 강타했고 연말에는 시집 <황토>가 출간되어 시단을 흔들었다. 선배시인 김수영의 모더니즘에 기대어 자신의 시학(詩學)을 천명한 논문 <풍자냐 자살이냐>가 발표된 것도 그 무렵이다.
<농무>의 시인 신경림이 문단에 복귀한 것도 그해 가을이었고, 열악한 노동현실에 항의하여 젊은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것도 이때였다. 1960년대 말 김수영•신동엽이 잇달아 세상을 떠난 데 이은 김지하의 눈부신 등장과 신경림•이성부•조태일 등의 새로운 활약은 우리 사회와 문학 내부에서 거대한 전환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움직일 수 없는 신호였다. 이 전환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의식하고 가장 치열한 언어로 표현한 것은 김지하 자신일 텐데, 시집 <황토>의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작은 반도는 원귀(怨鬼)들의 아우성으로 가득차 있다. 외침, 전쟁, 폭정, 반란, 악질(惡疾)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숱한 인간들의 곡성으로 가득차 있다. 그 소리의 매체, 그 한(恨)의 전달자, 그 역사적 비극의 예리한 의식.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왔다. 강신(降神)의 시로.”
여기 표명된 시인으로서의 강렬한 사명감이 전통예술인 판소리의 형식을 빌어 표현된 작품이 담시 <오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은 그 정치적 파장과 사회적 폭발력 때문에 미학적 성취나 시사적(詩史的) 의의가 충실하게 검토되지 못했다. 지하 자신도 늘 그 점을 아쉬워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시 월평을 쓰던 나도 다음과 같은 소략한 언급에 그치고 말았다.
“이 작품을 단순한 현실풍자로만 보아넘기는 것은 피상적 판단에 그치기 쉽다. 도리어 그러한 생생한 풍자를 유기적으로 자기 내부에 용해시킨 시형식적 달성이야말로 한국시의 앞날을 밝게 한다.”(동아일보 1970.5.30)
그야말로 단순한 암시에 불과한 촌평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형식적 달성’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오적>이 당대 지배계층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강력한 풍자적 비판임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시의 드러난 부분일 뿐이다. 이 작품이 판소리의 가락과 화법을 빌리고 있다는 것도 쉽게 눈에 띈다.
어떤 점에서는 판소리라는 형식 자체도 (전통이라는) 외부에서 빌려온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양자의 생생하고도 유기적인 결합, 즉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품 상태의 판소리 형식을 현실비판의 살아 있는 무기로 힘차게 살려낸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김지하 고유의 진정한 성취이다. 후일 그는 <담시 전집>(솔 1993)을 간행하면서 “판소리의 현대화와 동학혁명 서사시는 내 꿈”이라고 언명한 바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판소리의 현대화는 김지하가 평생에 걸쳐 수행한 여러 고뇌 어린 예술적•이념적 및 실천적 탐색의 일부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김윤수•오윤 등과 함께 시작한 새로운 현실주의 미술운동이 오늘날 한국 미술의 주류의 위치에 올라섰음은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국문학자 조동일의 이론적 지도와 창작자 김지하의 실천적 노력이 결합된 결과로 새로운 현실적 생명력을 얻은 마당극, 마당굿, 탈춤, 풍물, 민요 등의 광범한 민중•민족연행은 알다시피 대학가를 중심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이후 이와 같은 방식의 민중문화운동은 운동권의 활동방식 자체를 바꾸기에 이르렀다.
사회가 변하면 문화도 달라지지만, 1970년대 이후 30년 동안 한국에서는 반대로 문화가 사회의 변화를 선도했다. 그 선두에 선 것이 다름 아닌 김지하였는데, 정치투쟁이 아니라 민중•민족문화운동이 사회변화에 앞장서고 의식혁명을 이끌 거라는 주장은 김지하의 오랜 신념이었다.
(4) 그러나 김지하가 불붙인 새로운 문화운동이 대학가를 거쳐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그 자신은 불행히도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의 독방은 유례없이 혹독한 감시 속에 철저히 고립되어 있어, 한 인간이 온전한 정신으로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1980년 12월 석방 뒤에도 집 앞의 감시는 계속되었고, 그는 고문과 감금의 후유증으로 병고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번뇌가 그 무렵에 나를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는 고백은 후유증의 심각성을 증언한다.
한편, 지하는 학생 시절부터 술을 좋아했다. 적당한 안주 없이 왕소금에 깡소주를 마시기 일쑤였다. 출옥 후에는 고통을 잊기 위해 더 심하게 술에 의존하게 된 것 같다. 1980년대에는 어쩌다가 내가 사는 대구에도 내려왔는데, 그러다가 우리 집에서 잔 적도 있다. 나로서는 그를 상대하기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출근을 위해 잠을 자야 하는데, 그는 소줏잔을 들고 담론을 그치지 않았다. 새벽에 깨 보면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고백건대 당시에 나는 그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 회고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번뇌가 그 무렵에 나를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 밤은 밤대로 끝없는 착종(錯綜)과 불면의 밤이었고, 낮은 낮대로 공연히 들뜨는 환상과 흥분의 나날이었다. 눈만 뜨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이 좌불안석. 오라는 곳도 많고 갈 곳도 많은 그런 날들이었다. 때론 소음이 음성으로 바뀌어 들리기도 하고, 때론 대낮 천장 위에서 핏빛 댓이파리들의 무서운 춤을 보기도 했다. 번뇌였다.” (김지하 회고록, <흰 그늘의 길 3> 55쪽)
오늘 나는 40여 년 지난날을 돌아보며 한없이 아픈 마음으로 시집 <화개(花開)>((2002)에 실린 그의 시 <횔덜린>을 읽는다. 횔덜린을 읽으며
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시인의 뇌 속에 내리는
내리는 비를 타고
거꾸로 오르며 두 손을 놓고
횔덜린을 읽으며
운다
어둠을 어둠에 맡기고
두 손을 놓고 거꾸로 오르며
내리는 빗줄기를
거꾸로 그리며 두 손을 놓고
횔덜린을 읽으며
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1770~1843)이 누구던가. 철학자 헤겔, 작곡가 베토벤과 같은 해 태어났으나 자기 시대와의 불화로 인해 생애의 후반을 어둠 속에서 보낸 불후의 시인, 한 세기 이상 잊혀졌다가 20세기에 와서 돌연 ‘시인 중의 시인’으로 재발견된 인물, ‘신이 사라지고 자연과의 조화가 무너진 자기 시대’를 탄식하며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고귀한 신성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소임’이라 보았던 시인, 그러나 바로 그 너무도 순결했던 소임 때문에 생애의 후반 37년을 정신착란자로 살아야 했던 시인.... 그 횔덜린을 읽으며 눈물 흘리는 또 다른 한 시인을 나는 이제야 본다.
(5) 물론 지하는 1980년 석방 이후 30여 년 동안 정신적 고통과 사회적 고독에도 불구하고 횔덜린처럼 정신착란의 질곡에 유폐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극도의 고통 자체가 김지하 특유의 도전적 감성을 자극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번뇌와 방황 속에서 그의 모색은 수많은 시와 산문들로 나타났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헌신적 투쟁의 이미지로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1980년대 이후의 김지하, 특히 1991년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이후의 김지하는 점점 실망스러운 존재일지 몰랐다.
그러나 그가 남긴 책들을 읽어보면 그는 젊은 날부터의 수많은 지적•현실적 자극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이를 자기 나름으로 종합하고 극복하여 김지하 고유의 사상적 화엄의 통일체, 그 자신의 용어로 ‘움직이는 무(無)’의 상태에 이르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회고록 곳곳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군사정권과의 목숨을 건 투쟁은 그의 ‘적극적 선택’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의 회고록은 태어난 땅 전라도의 역사와 자신의 핏속을 흐르는 동학의 기억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실제로 그의 증조부는 구한말 동학참여 때문에 고향을 떠나 유랑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전라도라고 하는 천대받고 버려진 땅의 운명을 굴레처럼 짊어지고 한없이 고뇌하며 방황하면서 구원을 찾아 헤매는 헐벗은 구도자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의 조상들은) 뭍에서 반란에 가담했거나 법을 어기고 섬으로 몸을 숨긴 선조들의 거칠고 뜨거운 반역의 핏줄이 이어져 오지 않았나 싶다”(<흰 그늘의 길 1> 21쪽)라든지 “어둠의 땅으로서의 전라도가 가지는 ‘밤의 의식’이 내 시의 출발점이다. 그 슬픔이 없었다면 나의 저항적 감성의 싹이 틀 수 없었을지 모른다”는 회고록(같은 책 267쪽)의 언급에 나타난 상징성은 등단작 <황톳길>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그리고 그의 파란 많은 생애 전체에 변함없이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6) 김지하의 일생에 걸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무위당 장일순이다. 장일순은 일찍이 몽양 여운형의 추종자였고 몽양 사후 죽산 조봉암의 동조자이자 윤길중의 동지로서 혁신계 정당활동을 하다가 5.16으로 3년간 옥살이, 출옥한 뒤 가톨릭에 입교하고 고향인 원주에 은거하면서 지학순 주교와 함께 가톨릭에 기반한 이른바 ‘원주 캠프’를 이끌었다. 장일순에 대해 지하는 “선생의 사상은 단적으로 말해 좌우의 통합이었고 영성과 과학의 통전이었으며 동서양과 남북의 통일이었다”(<흰 그늘의 길 2> 81쪽)고 말한 바 있다. 여기 드러나듯 지하는 깊은 존경심과 충실성을 가지고 장일순의 노선을 따랐다. 그가 가톨릭 세례를 받고 난초 치는 것을 배운 것도 장일순의 모범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김지하를 단순히 가톨릭 신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점점 더 동학의 수운과 해월에 경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일부(金一夫, 1826~1898)의 <정역(正易)>과 강증산(姜甑山, 1871~1909)의 ‘후천개벽’설에도 귀를 기울였고 노자와 장자를 읽는가 하면 일부 무속신앙까지도 적극 받아들였다. 요컨대 김지하는 종교에서나 사상에서나 평생에 걸쳐 어떤 단일한 믿음에 고착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끊임없는 방황 속의 모색이 형벌과도 같은 그의 길이었다.
(7) 김지하가 내심으로 좋아한 시인은 정지용과 이용악이었다. 그러나 정지용은 지하와 체질적으로 매우 다르다. 정지용도 가톨릭이고 모더니스트의 훈련을 받아 새로운 감각의 시를 썼으면서도 <고향>이나 <향수>에서 보듯 민족정서를 능숙하게 노래했지만, 그는 무엇보다 언어의 조각가로서 이미지의 표현이 뛰어나다. 단아하고 성찰적이다. 반면에 김지하의 시는 역동적이고 음악적이며 자유분방하다. 김지하 시의 내재적 음악성이야말로 중요한 연구과제다.
젊은 날의 지하에게 거의 본능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 시인은 이용악이었다. 그는 나에게도 시집 <오랑캐꽃>을 여러번 암송하고 격찬한 적이 있었다. 식민지 시절 헐벗은 유랑민중의 구슬픈 자화상을 우울한 가락에 실어 노래한 이용악이야말로 김지하의 내면에 깊은 공명을 일으켰던 것 같다.
하지만 근대시의 맥락 속에서 김지하의 문학사적 위상을 냉정하게 검토하자면 임화(林和, 1908~53), 김수영(金洙暎, 1921~68), 김남주(金南柱, 1945~93)의 흐름 가운데 그를 세워볼 필요가 있다. 좀더 깊고 자상한 연구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틀림없이 그럴 때에야 드러나는 김지하 고유의 업적이 있고 나타나는 문제점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숙제다.
(2003년에 간행된 회고록 <흰 그늘의 길> 머리말에서 김지하는 “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는 분명한 고백 없이는 회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술회한다. 회고록의 다른 곳에서도 아버지의 좌익 전력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행동에 제약을 받은 적이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1975년 3월 그는 인혁당 관련자 고문 폭로의 글 때문에 정부 당국으로부터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겪기도 한다. 이때 그가 감옥 안에서 작성하여 비밀리에 유출한 문건이 유명한 <양심선언>인데, 그 글에서 그는 단호히 주장했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해서 지금껏 나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으며 현재에도 나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남녘땅 뱃노래>, 1985, 44쪽)
이것은 그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부인한 것이 결코 아니다. 평생에 걸친 그의 자유분방한 언행들, 그가 써서 발표한 수많은 문장이야말로 그가 어떤 특정한 사상이나 이념의 추종자가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그렇다면 그가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없었던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김지하도 우리 시대의 위기와 혼란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누구보다 큰소리로 문명전환을 주장한다. 서구세력이 이끌어온 오늘의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아버지 세대의 사회주의 혁명으로는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확언한다.
“인간은 감성과 이성만으로는 완전히 정곡을 찌를 수 없고 거기에 제삼의 힘, 아니 근원적인 힘인 영성이 발동해야 무엇인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끝없는 감탄사와 함께 절감하였다”(<흰 그늘의 길 2> 202쪽)
”이제 다가오고 있는 세계혁명은 정치경제의 하부구조적 혁명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새로운 정치경제적 양식의 씨앗을 내부에 이미 간직하고 있는 문화의 대혁명인 것이다”(같은 책, 206쪽)
그는 진정한 혁명으로서의 문화대혁명의 씨앗이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한반도, 그 중에서도 가장 핍박받고 헐벗은 남녘땅 민중 속에, 그들의 고유정서와 전통사상 속에 잠재해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 예언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살려내는 일이 자신의 과업이라는 생각을 남기고 그는 저세상으로 떠났다.
(9) 생애의 마지막 10여 년에 보인 그의 정치적 행보가 아쉽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많은 사람이 그를 비난하고 외면했다. 그 비난과 외면의 일정한 타당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병고에 시달리던 노년의 김지하가 타인의 비판 안에 들어 있는 합리적 핵심을 붙잡아 자신의 인간적 성숙을 위한 거름으로 삼을 힘을 이제는 잃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점 김지하를 사랑했던 동료와 후배들을 한없이 가슴 아프게 한다.
생각건대 김지하는 미지의 존재이다. 그의 80년 생애와 그가 남긴 방대한 저작들은 아직 제대로 검토 연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필요한 것은 그의 삶과 죽음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시대 변경사 (0) | 2023.05.03 |
---|---|
[아폴리네르](1880-1918) 상형언어의 입체화 실험 (0) | 2022.07.12 |
꽃이 없다면 (0) | 2022.05.20 |
김지하 시인 (0) | 2022.05.09 |
스키타이 칸 단군 –백남준 (0) | 2022.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