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에트랑제) / 보들레르
- 수수께끼 같은 사람아, 자네는 누굴 가장 사랑하는가?
말해보게. 아버지, 어머니, 누이, 형제인가?”
“내겐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다네”
- 친구들은?
“당신들은 이날까지도 내겐 엉뚱하고 의미조차 없는 말을 하는군요”
- 조국은?
“그게 어느 위도에 위치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오”
- 미인은?
“그야 기꺼이 사랑하겠지만, 불멸의 여신이라면”
- 황금은?
“당신이 신을 증오하듯 나는 황금을 증오하오”
- 그래! 그럼 자네는 대관절 뭘 사랑하는가, 알다가도 모를 이 이상한 친구야?
“구름을 사랑하지... 흘러가는 구름을... 저기... 저...신기한 구름을!”
-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 (1869) 중에서
L'Étranger - Charles Baudelaire
Le poème est écrit en prose, comprend 12 vers et constitue un dialogue entre deux personnes.
— Qui aimes-tu le mieux, homme énigmatique, dis ? ton père, ta mère, ta sœur ou ton frère ?
— Je n’ai ni père, ni mère, ni sœur, ni frère.
— Tes amis ?
— Vous vous servez là d’une parole dont le sens m’est resté jusqu’à ce jour inconnu.
— Ta patrie ?
— J’ignore sous quelle latitude elle est située.
— La beauté ?
— Je l’aimerais volontiers, déesse et immortelle.
— L’or ?
— Je le hais comme vous haïssez Dieu.
— Eh ! qu’aimes-tu donc, extraordinaire étranger ?
— J’aime les nuages… les nuages qui passent… là-bas… là-bas… les merveilleux nuages !
<보들레르, 명문고 다니다가 불량학생으로 쫓겨나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년 4월 9일~1867년 8월 31일)는 파리 6구의 오트피유가(Rue Hautefeuille) 1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이미 62살이었던 아버지(Joseph-François Baudlelaire, 1759~1827)는 보들레르가 6살이 되던 해에 죽고, 젊은 어머니 카롤린(CarolineDufas, 1794~ 1871)은 1828년에 군인 자크 오피크(Jacques Aupick, 1789~1857)와 재혼해 오피크 부인이 된다.
1829년 파리의 한 기숙 학교에 다니다가 1831년 샤를마뉴 콜레주(Collège Charlemagne, 현재의 Petit Lycée)로 옮겼다. 1832년 의붓아버지를 따라 리옹(Lyon)으로 가 왕립콜레주(RoyalCollege, 현재의 College-lycée Ampere)에서 4년간 공부하고 1836년 파리의 명문 왕립 학교인 리세 루이 르 그랑(Lycée Louis-le-Grand)에 들어간다.
1839년 마지막 학년에 태도 불량으로 쫓겨난 보들레르는 파리 5구 학교 인근의 기숙사(Pension Lévêque et Bailly)에 머물며 생 루이 콜레주(College Saint-Louis)에 편입해 남은 수업을 끝내고 그 해 8월 학위를 받는다. 이 시기 보들레르는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 이를 걱정한 의붓아버지가 1841년 그를 인도로 보내려 하지만, 그는 모리셔스(Mauritius)(마다가스카르 동쪽의 작은 섬으로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거쳐 당시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다.]와 그 옆의 레위니옹 섬(Réunion) (현재까지 프랑스령 이다.]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파리로 돌아온 보들레르는 1842년부터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테오필 고티에 (Théophile Gautier) 등의 문우와 알게 되고, 배우 잔느 뒤발(Jeanne Duval)을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약 2년 만에 친아버지 유산의 절반 이상을 탕진해 가족들의 요청으로 1844년 금산자 선고를 받는다.
이후 그는 평생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한다. 보들레르의 첫 작품은 1845년에 보들레르 뒤파이Baudelaire Dufays)' [뒤파이는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이다.]라는 필명으로 낸 평문 『1845년 살롱전(Salon de 1845)이다. 1846년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Croix)를 지지하는 두 번째 살롱 비평을 쓰고, 이듬해에는 중편 소설 「라팡파를로(La Fanfarlo)』를 발표했다.
낭만주의의 옹호자로 이름을 얻기 시작한 보들레르는 1848년 혁명에 참여했다. 그 외에도 예술 비평을 쓰고 에드거 앨런 포(Adgar Allen Poe)의 작품을 번역하는 등 다양한 문학 활동에 들어갔다.
1857년 풀레 말라시와 드 브루아즈(Poulet-Malassis et de broise)출판사에서 악의 꽃(Les fleurs du mal)』 초판을 출간하나 풍속 문란을 이유로 벌금과 일부 시 삭제를 언도받는다. 이 무렵 파리 문화계의 이름난 매춘부이자 뮤즈이던 사바티에 부인 (Apollonie Sabatier)과 연인이 된다.
마약과 빈곤에 시달리던 보들레르는 1858년부터 채널 제도(Channel Islands, iles Anglo-Normandes)를 바라보는 항구 도시 옹플뢰르(Honfleur)의 어머니 집에 머물며 항해」, 「백조」 등을 쓴다. 1860년에 시집 『인공 정원(Lies paradis artificiels)』이, 1861년에는 6개의 시를 삭제하고 35편의 시를 더하며 6개 부로 편성한 두 번째 『악의 꽃』이 출간된다.
이 또한 재정적으로 실패하고 그의모든 책을 냈던 출판사마저 파산하자 그는 크게 상심했다. 이 무렵에도 예술평론을 계속 썼는데, 1863년에 집필한 현대 생활의 화가(Le Peintre de la Viemoderne)」도 그 중 하나다.
뒤발과 결별 후 1864년 작품을 팔고 강의를 얻을 희망으로, 또 빚 독촉을 피해 브뤼셀로 떠난다. 그러나 브뤼셀에서 냉대받으면서 아편 중독은 더욱 심해졌고, 말라르메와 베를렌이 그를 상징주의의 아버지로 칭송했으나 보들레르에게 기쁨이 되지는 못했다.
성병과 빈곤에 시달리며 훗날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 : Petits poèmes en prose)』에 수록될 산문 시들을 집필해 나갔으나, 1866년 들어 뇌졸중과 중풍, 실어증까지 덮치면서 브뤼셀과 파리의 요양원을 전전했다.
보들레르는 1867년 8월 31일 46세의 나이로 사망해 파리 14구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Cimetière duMontparnasse)에 안치됐다. 1869년, 산문 시집 『파리의 우울』이 출판되었고, 후인 1871년 8월 18일 그의 평생의 후원자이자 우상, 벗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은 물론 현대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이 프랑스에서 해금된 것은 출간 후 거의 100년이 지난 1949년이었다.
[황현산]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문학동네, 2015)을 완역했고 악의꽃』(민음사, 2016) 일부를 번역 출간했으며, 관련해 발터 벤야민의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 보를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관하여』(길, 2010)를 공역했다. 악의 꽃을 완역했으나 생전에 출간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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