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부질없는 시(詩)
- 정현종 70년대 시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 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 한다면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시인은 시의 도구화나 유용성을 부정한다. 시로 무엇을 사랑할 수도, 슬퍼할 수도, 얻을 수도, 버릴 수도, 세울 수도, 허물어뜨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시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시는 깊은 밤에 내려 아무 발자국도 없어 아무도 본 사람이 없지만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아름다운’ 것이다. 시는 존재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평론가 이남호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한심한 영혼아, 너는 굶주렸지만 포도주를 마시고 고기와 빵을 먹는 대신에 하얀 종이를 꺼내서 ‘포도주ㆍ고기ㆍ빵’이라고 써 넣고는 그 종이를 먹는구나.’라는 말을 빌려 시인을 ‘한심한 영혼’이라 한다. 그것은 이 시처럼 문학은 현실적 효용과 다르게 존재 방식을 가진다는 말이다". -김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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