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시

[정현종] 시(詩), 부질없는 시(詩)

김형순 '스키타이' 2022. 1. 21. 10:38

(), 부질없는 시()
- 정현종 70년대 시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 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 한다면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시인은 시의 도구화나 유용성을 부정한다시로 무엇을 사랑할 수도슬퍼할 수도얻을 수도버릴 수도세울 수도허물어뜨릴 수도 없다그렇다면 시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시는 깊은 밤에 내려 아무 발자국도 없어 아무도 본 사람이 없지만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아름다운’ 것이다시는 존재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평론가 이남호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한심한 영혼아너는 굶주렸지만 포도주를 마시고 고기와 빵을 먹는 대신에 하얀 종이를 꺼내서 포도주고기이라고 써 넣고는 그 종이를 먹는구나.’라는 말을 빌려 시인을 한심한 영혼이라 한다그것은 이 시처럼 문학은 현실적 효용과 다르게 존재 방식을 가진다는 말이다". -김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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