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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雲住寺), 가을비

운주사(雲住寺), 가을비 - 르 클레지오(노벨문학상 수상자) 흩날리는 부드러운 가을비 속에 꿈꾸는 눈 하늘을 관조하는 와불(臥佛) 구전에 따르면, 애초에 세분이었으나 한 분 시위불이 홀연 절벽쪽으로 일어나 가셨다. 아직도 등을 땅에 대고 누운 두분 부처는 일어날 날을 기다리신다 그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거란다. 서울거리에 젊은이들, 아가씨들 시간을 다투고 초를 다툰다. 무언가를 사고, 팔고 만들고, 창조하고, 찾는다. 운주사의 가을단풍 속에 구름도랑을 바치고 계시는 두분 부처님을 아뜩 잊은채 (중략) 고요하고 정겨운 인사동의 아침 광주 예술인의 거리 청소부들은 거리의 널린 판지들을 거두고 아직도 문이 열린 카페에는 두 연인들이 손을 놓지 못한다. 살며, 행동하며 맛보고 방관하고 오감을 빠져들게 한다 번..

기성시 2023.11.25

강가에 서면

강가에 서면 강가에 서면 너는 나무가 되고 나는 바람이 되고 네가 내 귀를 간질이면 난 네 속삭임에 숨이 멎고 말없이 서 있는 너 나무여! 네 등에 기대면 내 몸에 바람이 일고 산다는 건 꿈꾸며, 기다리며, 춤추는 것 강가에 서면 넌 푸른 나무이고 난 하얀 바람이고 우린 서로가 다르게 아름다워지고 어린 연인들처럼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되고 1992.07.22

자작시 2023.11.25

떨어짐의 아름다움

떨어짐의 아름다움 늦은 가을 샛노란 낙엽이 떨어지다 봄의 붉은 꽃잎처럼 떨어지다 여름의 거친 빗물처럼 떨어지다 겨울의 하얀 눈발처럼 떨어진다 떨어진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자신을 비워내고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것 떨어짐의 그 심오한 뜻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어라 인간이 가을의 낙엽만큼이라도 사유의 깊이를 갖춘다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평화롭게 될 것이다 2016.11.15. 낙서

자작시 2023.11.15

시인의 피- 장 콕토를 위하여

시인의 피 - 장 콕토를 위하여 시인의 이마에 피가 흐른다 시인의 가슴이 폭포수처럼 터지고 시인의 창자가 백짓장처럼 뚫어진다 손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그 눈빛은 이글이글거린다 시인의 머리는 피로 물든 가시관이 된다 시인의 호흡은 숨가쁘게 끊어지고 그의 목구멍은 피가 터져 차갑게 식어 간다 칼과 창의 날카로운 햇살이 시인의 뇌리에 꽂힐 때 그 어디에서나 기적같이 하나의 노래가 떠오른다 리듬의 혼을 타고 광란의 바람을 불어온다 시인이여 피를 흘려라 온몸에 피를 흘려라 이 땅에 죽어서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 되어라 1984. 2. 4 聖 발렌타인 날에

자작시 2023.11.11

가을 풍경

2019.11.05 가을의 숲은 정령이 산다 나는 과즙 같은 가을의 농액을 마신다 가을 전원이 불탄다 나무가 갖은 빛깔로 옷을 물들인다 가을의 풍경을 내 가슴에 안는다 붉은 놀처럼 가을 색이 농후하게 익는다 가을의 숨결이 바람결처럼 스쳐간다 가을의 내음이 그녀의 머릿결처럼 향긋하다 가을은 우주 만물의 음양오행이 제 자리를 잡게 한다 가을에 휘감겨 나의 혼을 혼미해 진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가을을 주워 내 가슴에 단다 가을은 세상이 생길 그 처음 때를 다시 보게 한다 모든 게 다 깊은 가을이다. 2019.11.05

자작시 2023.11.05

후원 입구에서

후원 입구에서 후원(後園), 일명 비원 영어로 시크릿 가든이다 왕이 여기 와 공부하면서 잠시 머리를 식혔다 한국정원미의 진수를 다 보여준다 부용정도 있고 왕립도서관도 있다 후원 입구를 들어설 땐 언제나 100% 만족이다 왜냐하면 여긴 인종이 울긋불긋하기에 멀티-미디어다 인터-미디어다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울긋불긋하다 2018.10.25.

자작시 2023.10.27

오늘은 내가 가을이다

[즉흥시] 오늘은 내가 가을이다 2016년 10월 27일 정오 그 따사로운 가을햇살에 내 온 몸이 짜릿하다 내 온 마음에 전율이 온다 말할 수 없는 계절의 풍요로움과 우주의 넓은 품에 깊게 빠지는 것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연과 상승이 느껴진다 오르가슴이다 오늘은 가을이 사랑이다 가을이 맑은 하늘이 된다 가을이 붉은 노을이 된다 오늘처럼 가을이 이렇게 나를 유혹적인 적이 있었나 오늘처럼 가을이 이렇게 나를 황홀하게 한 적이 있었나 오늘은 내가 가을이다 내가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 이렇게 싸늘한 가을에 이렇게 써늘한 가을에 나는 이 가을의 심연에 깊이 빠진다 이 가을의 심오함에 마냥 사로잡힌다 2016.10.27

자작시 2023.10.27

[길상호] 바람의 무늬

바람의 무늬 - 길상호 시인(1973년생 논산출생) 산길 숨차게 내려와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내 마음의 끝가지도 툭툭 부러뜨리는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따르고나의 생각들도 쫓아갔다가 이내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만큼이나 아득하여서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바람과 나무가 나누는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의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풍경 소리가 내 마..

기성시 2023.10.27

아현동 산책

아현동 산책 -신촌路 32길에서 35길 사이를 걷으며 되도 안 되는 낙서시를 써보다 마포구와 서대문구를 가르는데 기준이 되는 신촌로 중간에 고가도로 지금은 없어져 넓게 보이고 그중 32길에서 35길 사이를 걷다보면 서울의 서민들 삶이 보인다 거리의 3분의 1은 부동산인 것 같다 주택난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소리 세살 집도 구해야 하고 가능하면 집도 마련해야 하고 영어교실 요즘 영어모르면 취직도 못하고 요즘은 중국어도 유행이다 결혼도 해야 하고 어딜 보니 상담소도 있고요 하여간 이 거리는 웨딩드레스거리로 유명하다 개도 키워야 하고 애완용품 파는 곳은 날로 늘어나고 집에 살다보면 물이 새고 막히고 어딘가 고장 나고 집을 손을 봐야 하니 건재 철물 전기 같은 간판이 붙은 가게들 목공소 페인트 점 등등 김치도 담..

자작시 2023.10.24